장부 기록만 하되 공개 안한 봉건시대
서기 476년 로마의 몰락으로 국가는 황제와 왕, 영주의 개인 봉 토로 바뀌어갔습니다. 이제 귀족들이 관료 국가를 대신하게 되었고 이들은 오직 신에게만 해명의 책임이 있었으므로, 국가를 감사하는 일은 불가능해졌습니다. 서로마 제국이 무너졌을 때도, 그 계승 자인 가톨릭교회와 대형 수도원들은 계속해서 회계와 감사를 통해 토지와 재산과 지불금을 관리했습니다. 그리고 고트족과 프랑크족, 바 이킹족의 침략으로, 샤를마뉴 대제(742~814년)와 오토 대제(914~973 년)부터 정복자 윌리엄(1028~1087년)(잉글랜드 노르만 왕조의 1대 왕인 윌리엄 1세)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왕들은 자신들이 정복한 땅을 관리하고 이익을 뽑아내기 위해 다시금 법규를 수립하려 했습니다. 게르만 왕국과 자치주들, 그리고 옛 로마의 부동산 제도의 융합으로 등장한 봉건주의는 영주와 봉신과 농노들이 얽혀 끊임없이 변화하 는 시스템이었습니다. 그런데 봉건주의가 지닌 커다란 역설 중 하나는 국유지가 개인 소유로 바뀌면서 더디지만 꾸준한 문서 작업과 회계의 증대를 가져왔다는 점입니다. 중세 시대의 근간을 이룬 것은 교부(역사적으로 기독교 초기의 교의와 교회 발달에 큰 공헌을 한 교사와 그 옹호자를 말함)들에 의해 정립된 기독교 및 수도원의 전통과 아울러 샤를마뉴의 행정 기록인 법령집에 담긴 세금과 재산의 개념입니다. 이처럼 회계는 여전히 중심적인 통치 도구였지만, 부유한 수도원과 프랑크 왕, 영주들은 아우구스투스식 재정 공개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서기 1000년경 교역이 늘면서 기록과 법적 계약과 회계의 중요성도 커졌습니다. 1066년 정복자 윌리엄은 잉글랜드를 침략했을 때 절호의 기회를 얻었습니다. 한꺼번에 나라 전체를 통째로 인수하면서 봉건 관련 기록을 전부 처음부터 다시 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왕가의 유산과 결혼 등으로 토지 소유권이 쪼개지면서 영토 분쟁을 낳았던 전통적인 봉건주의 모델의 복잡성을 피하면서 나라 전체에 대한 통치권을 얻었습니다. 노르만의 잉글 랜드 정복은 행정 제도를 중앙집중화할 기회와 함께, 세속적 통치자와 기독교 통치자 모두에게 보다 분명하게 재무를 기록하도록 요구하는 새로운 봉건 토지 계약의 확산을 가져왔습니다. 윌리엄의 개인적 기록이자 재산권, 법적 특혜와 의무, 기독교 권리를 상세히 밝힌 장부인 둠즈데이북(1086년)은 윌리엄이 이전 왕가의 합의에 따라 어떤 세금을 징수할 수 있었는지도 보여줍니다. 제목에 포함된 '둠즈데이' 라는 표현은 왕실의 회계감사를 하느님의 최후의 심판과 동일시함으로써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1200년대에는 무역과 통화 흐름이 다시 활성화되면서 국가와 지주들이 회계장부를 기록하는 데 공을 들이기 시작했으며, 헌장과 법령, 증서와 서신, 영장, 재무 기록, 임대 계약서, 법적 기록, 연감, 연대기, 권리 증서 원장(봉전 증서 및 기독교 증세), 등록부(법적이거나 행정적인 서류로써 주로 법원과 의회가 보유), 그리고 학술 및 문학 작품을 비롯 하여 육필로 쓴 기록들이 확산되었습니다. 이 문서들은 모두 회계장부 기록과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법과 재산과 조세를 관리하고 집행하려면 국가 정보망의 근간이 되는 모든 재정 거래 자료를 기록하고 수집 하고, 보관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잉글랜드에서 재무부 혹은 왕실 재무 관은 소득과 지출과 벌금을 적은 상세한 회계장부를 작성하기 시작했는데, 이 기록은 양피지를 말아놓은 형태여서 '파이프 롤이라고 불렸습니다. 주로 투자나 노동에서 수익을 얻기보다는 왕실의 세금을 징수하려는 목적으로 쓰였습니다. 국가 문서들은 재무관실과 시청분만 아니라 법원이나 의회 문서 보관소에도 보관되어 변호사의 자문을 받았고, 시장과 장관과 군주 가 개인 소장 자료로도 보관했습니다. 봉건 지배와 중세 경제의 구심점 이었던 장원 영주의 저택은 회계의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봉건 영주들은 머릿속에 이익이라는 개념이 정립되어 있지 않았는데도 봉토를 운영하여 흑자를 내려했습니다. 회계장부를 갖는 것은 일종의 특권이었습니다. 양피지는 값이 비싸서 규모가 크건 작건 기록하는데 돈이 많 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숙달된 필경사도 드물었고 필경사를 훈련시키는 데에 비용이 많이 들었습니다. 많은 경우 회계는 단순히 매일매일의 지출을 관리하기 위해 이루어졌고 장기적인 기록으로 보존되지는 않았습니다. 잉글랜드에서는 집행관이나 관리인 또는 법정 토지 관리자가 모든 채무 면제 증서를 집계하고 거래와 재산에 적절한 제목을 달고 기본적인 집계를 기록하는 업무를 비롯해 단식 회계를 배웠습니다. 집행관은 우선 체납금을 기록해야 했고 수입과 그 밖의 다른 형식의 재산도 기입해야 했습니다. 그다음 본인 소유 토지에서 구할 수 없는 물건에 대한 지출과 인건비를 나열했습니다.
신에게만 결산보고
감사는 공증인과 주장관의 중심 업무였으며, 이들은 정부 관료, 특히 세리와 재무관의 회계 기록을 확인했습니다. '감사'를 뜻하는 이라는 단어는 통치자와 군주가 회계 기록을 눈으로 보기보다 귀로 듣던 시절에 나온 것입니다. 13세기에 감사 업무를 담당 한 관리는 국고 회계 감사관이라고 불렸습니다. 잉글랜드의 재정 지출과 세수는 점차 의회의 감시 대상이 되었습니다. 다양한 정부 부처에서 국가 재정을 점증해야했으니 헌법에 감사 활동이 규정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마어마했을 국왕의 지출과 개인 수입은 대개 비밀로 남았습니다. 국왕이 기본적인 지출 기록을 의회에 제출한 적도 드물게 있었지만, 실효성 있는 감사 제도는 없었습니다. 에드워드 3세(재위 1327~1377년)는 국왕은 신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결산 보고를 하지 않는다고 언명했습니다. 19세기까지 유럽의 왕들은 계속해서 이런 입장을 고수합니다. 책과 두루마리 형태로 된 회계장부들을 보면 '그런 장부들이 제대로 기능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분명 매일 기록을 관리하는 회계사는 회계장부에 어느 정도 숙달했다고 자신할 만큼 근면하고 유능했을 것입니다. 현금과 재고 관리에서는 그런 편이었지만, 여기서도 완전히 정확하지는 못했습니다. 아라비아 숫자와 분수가 없었던 로마 숫자 체계에는 근본적인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회계사가 아무리 주의 깊어도 X나 C나 I가 무더기로 나와 속수무책이었다. 예를 들 어 893은 DCCCXCIII로 길고 복잡하게 나타내는 식이었습니다. 분수라는 개념이 들어설 자리는 없었죠. 복잡한 무역이 번성하고 발전하려면 새로운 숫자와 재무 회계 방식이 필요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