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키케로 - 장부 공개 요구
정직하건 정직하지 않건 회계는 로마에서도 번성하여 가정 경 제의 토대를 이루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공공재정의 관리에 대한 개념을 갖고 있었으며 그것을 '오이코노미아라고 불렀 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경제학’이라는 용어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오이코노미아는 현대적 의미의 경제학처럼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재무 관리가 아니라 정부와 가계를 잘 관리하는 것을 뜻했습니다. 로마인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을 도입함에 따라 이제 가정이라는 사적인 영역에서 회계가 시작되었고, 국가는 가장에게 가계부를 기록할 임무를 맡겼으며, 이 가계부를 세리들이 감사하게 했습니다. 가장은 매일 모든 출납을 일지에 기록했고, 월말에는 소득과 지출 기록부에 일지 내용을 기록하는 것은 물론이고 종종 미수금과 채무 잔고, 잔고대출까지 기록했습니다. 대금업자들도 똑같이 기본적인 단식 부기 장부를 기록했습니다. 대금업자뿐만 아니라 간혹 시민들도 장부를 결산하여 지역 정무관인 법무관에게 감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로마 공화정과 초기 로마 제국은 국가 재원을 감시하는 관리들로 구성된 감사 집단에 의해 관리되었다. 대 플리니우스는 박물지(Historia Naturalis)에서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넌 해인 기원전 49년에 로마 국고에는 금 1만 7,410파운드, 은 2만 2,070파운드, 그리고 동전 613만 5,400세스테르티우스가 있었다고 진술했습니다. 국고 관리 회계원들은 조폐국 회계원이나 그 조수들과 연락을 주고받아, 국가 지출과 대부분의 군비 지출을 지불할 만큼 통화가 충분한지 확인했습니다.
로마의 재무관은 국고의 열쇠를, 지금은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신전인 사투르누스 신전에 보관했는데, 이 신전에는 로마법이 기록된 서판도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국고 내부에서 필경사들은 이름과 날짜, 각각의 거래 유형, 들어오고 나가는 현금 등록부를 기록하여 월 단위로 보관했습니다. 부채와 군대 및 지방 재무관들의 유동성 계정 혹은 현금 계정을 다룬 별도의 등록부도 있었습니다. 중앙 공문서 보관소인 타불라리움은 관리자의 감독을 받았으며, 감독관, 필경사, 회계원, 출납원을 직원으로 두었습니다. 아테네와 마찬가지로 로마의 국가 회계는 일관성이 없었고 기만 행위가 만연했습니다. 키케로는 필리피카이(기원전 44~43년)에서 부채와 수상한 재무 처리로 악명 높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공격하며 부실 회계를 비난했습니다. 그는 안토니우스가 부실한 회계장부를 기록했고, 그럼으로써 카이사르에게서 훔친 '수없이 많은 돈을 탕진하고' 심지어 회계장부와 서명까지 날조했다고 주장했습니다. 키케로가 비난한 것은 부실 장부였는데도 부집정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키케로를 붙잡아 그의 머리와 그 글을 쓴 손을 잘라 광장에 전시했습니다. 이러한 잔인성은 시공을 초월해 언제나 적용되는 한 가지 원리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권력자들은 장부 공개를 요구하는 자들에게 호의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부실 회계는 결국 당사자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가는 법. 아우구스투스가 (군대 조직 실력도 장부 기록 실력 못지않았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제치고 권력을 차지하여 황제가 됨으로써 혼란스러운 제국에, 그리고 동시에 (이제는 황제의 것이 된) 회계장 부에도 질서를 가져왔습니다. 그 적수와 달리, 아우구스투스는 회계장 부인 라티오나리움을 제대로 기록하고 관리했습니다. 실제로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는 아우구스투스가 황제(재위 기원전 27~서기 14년)가 된 뒤에도 장부를 손수 기록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장부에는 제국의 재정 상태 요약, 군대와 건축 공사의 통계, 지방 국고에 남 아 있는 현금 액수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로마 시대 회계의 중대한 결함
아우구스투스는 이 개인적인 회계 기록을 바탕으로 아우구스투 스 업적록을 썼습키다. 업적록은 공공건물의 벽과 석판에 새겨져 전국 방방곡곡에 게시되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연 세입이 5억 세스테르티우스였는데도, 그가 이룬 업적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건축과 군대, 가장 중요한 병사들에게 쓰인 돈이 모두 자신의 개인 금고에서 지불되었다고 애써 강조했습니다. 또한 병사들이 사용한 물품 대금을 해당 마을에 지불하는 등 자신이 개인 재산을 어떻게 처리 했는지도 밝혔으며, 자신이 얼마나 통 큰 인물인지 선전하기 위해 총액도 밝혔습니다. 이처럼 아우구스투스는 제국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 적극적으로 사고했고, 사업을 개념화하고 계획하는 도구이자 선전의 도구로써 회계장부를 이용했습니다. 이후 제국 회계장부의 자료를 공개하는 것은 전통이 되었습니다. 티베리우스 황제는 이 전통을 계승하지 않았지만, 칼리굴라는 제국의 전반적인 회계 기록 상태를 발표했습니다. 황금에 대한 각별한 관심으로 유명한 네로(서기 37~68년)는 법무관 권한이 있는 원로원 위원을 임명하여 사투르누스 신전의 국고를 관리하게 했다. 또한 아우구스 투스의 황제 재무관실이 적어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집권(재위 244~311년)할 때까지는 계속 기능했다는 증거도 상당했습니다. 이처럼 회계 시스템은 제국 관리의 중심 도구이자 정당화의 역 할까지 했지만 여전히 중대한 결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장부를 기록 하고 회계감사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기만행위가 예상되었습니다. 그리고 특히 유력 인사가 관련된 경우에 체계적으로 용인되었습니다. 동시에 로마 제국의 경제적 관행은 복식부기의 주된 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윤과 미래의 수입에 초점을 두지 않았습니다. 지중해는 해상 운송과 무역으로 로마 제국을 지했지만, 모든 무역 활동을 이론화할 포괄적인 개념이나 체계는 없었습니다. 한편 대출은 전당포 모델에 따라 이루어졌고, 따라서 신용 문화의 발전을 저해했습니다. 궁전과 축적된 금에서 나오는 부가, 투자해서 이익을 내는 자본이라는 부 개념보다 우세했습니다. 이렇듯 이론적, 실천적 작업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상거래를 위한 경제학이라는 개념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중앙 재무관들은 황제의 이익을 반영하는 쪽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제국이 쇠락해감에 따라 공공 회계는 점차 황제 개인의 영향권 아래로 들어가서, 에드워드 기번이 지적한 것처럼 모든 지출이 국가가 아닌 '군주의 하사금에서 나왔다'는 관념이 모든 이에게 주입되었습니다. 이후의 황제들은 국고를 신성하게 여겼고, 콘스탄티누스가 325년 보스포루스에 새로운 로마 수도(콘스탄티노플)를 건설한 무렵, 국고의 최고 관리자는 직업 관료가 아닌 귀족 계급의 백작이 차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