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아우구스투스의 회계장부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오늘날 건축물과 조각상으로 유명하죠. 고대 역사서와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소설 「나, 클라우디우스」에서 좀 지나치다 싶을 만큼 수수하고 자애로운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벽돌의 도시 로마를 발견하여 번쩍번쩍한 대리석의 도시로 만들었노라고 주장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가 쥐었던 권력의 열쇠는 자신의 통치에 대해 손수 기록한 아우구스투스 업적록(서기 14년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많은 수치들을 대면서 건축물과 군대와 위업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아우구스투스는 수치로 자신의 성공을 측정했으며, 전투에서 승리한 로마 군인들에게 자신의 금고에서 1억 7,000만 세스테르티우스를 지불했다고 자랑스럽게 썼습니다. 아우구스투스가 이룬 업적의 상징인 재무수치는 기본적인 회계장부 기록에서 가져온 것들이었습니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진정한 창시자이자 로마 제국의 아버지인 그는 회계와 수치의 투명성을 정치적 정당성과 업적에 결부시켰습니다. 회계의 역사에서 흔히 있는 일이지만 누구도 이 점에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회계를 하는 황제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습니다. 이 로마 제국의 아버지를 따르고 모방한 모든 군주와 왕 가운데 업적록의 형식을 그대로 따라 한 이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회계장부의 수치를 알지 못했거나 이해하지 못했으며 회계장부를 왕실의 힘을 보여주는 척도로서 발표하지도 않았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회계장부가 보편화되어 있어서 자신처럼 로마식 교육을 받은 지배 계급의 가장이 회계장부 사용법 을 아는 것이 남부끄러운 일이 아닌 사회에서 살았습니자. 회계를 관리와 정당화의 도구로 이용했던 아우구스투스 이후에 등장한 다른 지도자들이 회계장부의 재무 수치를 발표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힘과 활동을 정당화하기까지는 무려 1,700여 년이나 걸렸습니다. 아우구스투스에게 좋은 방식으로 보였고 현재 표준으로 자리 잡은 방식이 뿌리를 내리기까지 천 년 이상이 걸린 것입니다. 회계는 고대의 메소포타미아 그리스, 로마에서 서서히 발전하여 마침내 중세 이탈리아인들에 의해 복식부기로 변모되었고, 이것은 자본주의 기업과 정부 행정에서 강력하고 이로운 도구가 됩니다.
회계 시스템을 갖춘 아테네
수천 년 동안 고대 세계 구석구석에 회계가 스며들었지만 혁신 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아우구스투스처럼 이 도구를 적재적소에 이용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단식부기 회계는 고대 메소포타 미아, 이스라엘, 이집트, 중국, 그리스, 로마에 존재했습니다. 그리스인들과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의 이집트인들과 아랍인들은 놀라운 문명의 절정에 도달했고, 기하학과 천문학에 필요한 수치에 능통했으나 정확한 손익 계산에 필수적인 복식부기 회계를 창안하지는 못했습니다. 고대의 재무는 상점 회계, 곧 기본적인 재고 조사에 국한되었습니다. 막스 베버는 이런 한계가 사업과 가정 살림의 분리, 이익 개념의 결여, 그리고 일정 기간(예를 들어 1년)에 걸쳐 기업의 총 자산을 평가한다는 개념의 결여에서 기인한다고 믿었습니다. 자본과 이익에 대한 근대적 개념이 확립되지 않았음에도 회계 문화와 회계적 사고방식은 고대의 공적 생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문자 기록이 남아 있는 곳은 어디에서나 계수 표시나 원시적인 장부가 만들어졌습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계약이든 창고와 거래 기록이든, 모두 이 계수 표시로 장부를 만들었고 종종 빵집의 재고를 기록했습니다. 회계는 주로 재고 조사를 목적으로 했으나, 잉여 곡물을 계산하는 목적으로도 이용되었습니다. 잉여 곡물은 말하자면 마을에 정착하는 생활과 농경과 시장을 가져온 그야말로 문명의 부산물이었습니다. 수메르인들은 기원전 3500년에 주고받은 물건을 나타내는 회계용 점토 물표를 만들었습니다. 이 물표는 곧 기본적인 재고 기록을 위한 납작한 점토판으로 교체되었는데, 아시리아와 수메르 유물에서 흔히 발견된다.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기원 전 1772년)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규정(가장 초보적인 형태의 회계)뿐 아니라 기본 회계 규칙과 상업 거래에 대한 국가의 감사 규정으로 유명합니다. 법률 제 105조는 돈을 받고 도장을 찍지 않거나 서명하 지 않은 중개상은 회계장부에 그 거래를 기록할 수 없다고 명시합니다. 국가는 필경사들이 국고의 역할을 하는 '은의 집'에 통화 보유고를 기록하도록 했으며, 기본적인 재고 기록을 통해 곡물과 빵 비축량까지 추적했습니다. 국가가회계와 감사에 개입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숫자와 도덕은 정치와 결합되었습니다. 고대 아테네인들은 회계를 정치적 책임성과 연결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처음부터 복잡한 부기와 공적 감사 시스템이 아테네 민주주의 정부의 중심에 놓여 있었습니다. 아테네 국고는 신성 한 것으로 간주되어 델로스 섬에서 회계 담당자의 감시하에 관리되었고, 평민과 노예가 교육을 받아 회계장부 담당자로 고용되었습니다. 대다수 아테네인들은 공공노예를 회계 감사관으로 쓰는 것을 선호 했는데, 노예들은 심하게 고문할 수 있는 반면에 자유인들은 그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공공 회계를 감시하는 고위 관리와 장부 검토자도 있었습니다. 몇몇 세력가들에 의해 통치되고 재무 책임성 시스템이 갖추어지지 못한 과두제 정부와는 대조적으로, 민주주의 아테네 사회는 책임성의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모든 아테네 공무원의 회계장부는 기본적인 민주주의 정치 철학에 따라 감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아레오파고스(최고 재판소)의 원로들과 남녀 성직자들도 공금뿐 아니라 선물을 비롯하여 모든 자금을 철저히 기록해야 했습니다. 어떤 아테네 시민도 국가에 재산 내역을 신고하지 않으면 해외로 나가거나, 재산을 신에게 바치거나, 유언장을 작성하지 못했습니다. 아리스토 텔레스는 아테네 헌법을 다룬 마지막 저서에서 공공 회계감사를 담당하는 관리인 로기스타에 대해 설명했는데, 이들이 공무원과 시장의 장부를 감사했습니다. 부패 혐의가 의심되면 이 회계 관리들은 해당 관리의 주장을 듣기 전에 장부부터 파헤쳤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회계 기록과 정치적 책임성의 시스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테네에도 부패가 만연했으며, 사람들은 책임성이라는 개념과 갈등을 빚었습니다. 존경받는 장군이자 정치가였던 아리스티 데스(기원전 530~468년)는 로기스타가 엄격하게 감사하는 것이 비정상적인 행위로 여겨지고 있다며 한탄했습니다.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의 기만행위는 예측되고 용인되었으며, 공격적인 감사는 현상 유지를 위협하는 일로 보였습니다.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국가가 열 명의 감사관과 그 수만큼의 직인과 공증인을 두었다 한들 누군가의 정직성을 확실히 보장할 수는 없을 거라고 지적하며, 잔꾀가 밝은 사람들은 언제든지 장부를 조작할 수 있었음을 암시했습니다.